공동체는 좋은 말로 유지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 <AI 생성 이미지>
공동체는 좋은 말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부처님오신날 절 공양간에서 다시 한 번 보았다.
절은 며칠 전부터 분주했다. 신도회는 행사에 쓸 그릇을 꺼내 다시 닦고, 사람들이 가져갈 음식 봉지를 준비했다. 봉사회는 연등을 달고 테이블을 나르고, 과일을 씻고, 끝없이 들어오는 일을 처리했다. 누구 하나 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바빴다.
행사 당일 공양간은 전쟁터가 되었다. 씻은 그릇은 계속 산처럼 쌓였고, 그것을 얼른 닦아 다시 정리해야 다음 줄 선 사람들에게 밥을 떠 줄 수 있었다. 그 순간 공양간은 수행의 공간이라기보다 작은 공장에 가까웠다. 흐름이 멈추면 전체가 막혔다.
오후쯤부터 신도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국 스님에게 “이러다가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처음에는 과장처럼 들렸지만 지나고 보니 이해가 갔다. 행사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마지막으로 갈수록 책임이 몇 사람에게 몰린다. 누가 빠졌는지, 무엇이 남았는지, 말이 나올 일은 없는지, 결국 중간 책임자가 다 떠안게 된다.
그 무렵 학생들이 설거지를 돕겠다며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그릇 하나를 들고는 천천히 닦고 있었다. 나는 고무장갑과 앞치마를 건네며 말했다.
“설거지 하러 왔다며. 해봐.”
나는 설거지를 마친 후 그 그릇 정리 정도는 알아서 할 줄 알고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학생들은 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마지막 정리는 다시 부엌 담당 보살님들의 몫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돕는 것”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사실 학생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점점 “참여”는 가르치지만 “책임”은 가르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데 있다. 봉사도 경험이 되고, 공동체도 체험이 되고, 관계도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실제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늘 마지막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노동이다.
이건 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을 잔치든 학교 행사든 어느 모임이든 마지막에 의자를 접고 바닥을 닦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다. 그들이 빠지면 행사 자체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작 많은 사람들은 잘 보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참여”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참여의 숫자가 아니라 책임의 밀도다.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하고, 말없이 흐름을 조율하고, 보이지 않는 일을 감당해야 공동체가 유지된다.
문제는 그 역할이 늘 같은 사람들에게 몰린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면 공동체 안에는 피로와 서운함이 쌓인다. “왜 결국 내가 또 해야 하지”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실제로 행사 마지막에 과일과 떡을 나누는 일조차 아무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덜 가져갔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더 가져갔다고 서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거창한 정신론이 아니다.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책임의 순서를 공유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다. 공동체는 선의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반복되는 책임과 노동 위에서 겨우 유지된다.
그날 밤 법당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서운해하고 지쳐 있던 사람들도 다시 웃으며 합장했다. 어쩌면 공동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삐걱거리면서도 다시 굴러가는 것.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공동체는 좋은 말로 유지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